"어르신"이라는 존칭을 듣고 머리카락을 박박 깎았다

제목에는 존칭이라고 썼지만 과연 "어르신"이 요즘 세상에 존칭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지는 꽤 오래 됐다. 그리고 그것이 존칭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 때는 한 달 정도 전이다.


사연인즉슨,

옷깃을 스칠 만한 인연도 아닌, 집을 잘못 찾아온 어떤 장년 여성에게서 내가 바로 그 "어르신" 아니냐는 말을 들은 것이 한 달쯤 전이었다.


우리나라 나이 58이 됐고 머리카락이 반 백 이상이라면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붙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아야 할 때이긴 하다, 개인적으로 수긍하지만 정작 내 기분을 건드린 것은 내게 "어르신"이라 한 상대의 연령대였다. 내 아들, 딸 또래의 어린 나이라면 또 모를까, 그 쪽 나이도 만만찮아 아무리 차이가 나도 10년은 절대로 넘어갈 것 같지않은, 같은 장년의 아짐이 제 모습은 모르고 나더러 '어르신'이라니!?


내가 얼굴이 크고 팔자주름이 깊어 조로(早老)하는 스타일이란 걸 인정해도 거의 동년배의 사람에게서 그런 존칭을 듣는다는 건 적지않게 언짢은 일이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바리깡 말고 가위로 최대한 짧게 자를 수 있는 만큼 잘라 주세요"]

염색을 하지 않으면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그깟 게 뭐라고, 하는 생각과 함께 사람 만날 일 없고 귀찮다는 이유로 염색을 끊고 있었는데 기분이 언짢은 일을 당할 정도라면 그건 피해야겠기에 드디어 염색을 결심하고 일단 머리카락부터 자르러 갔다 - 머리카락이 짧아야 염색이 간단하니까 

내 부모님[70대 후반에 '할머니'라는 호칭이 싫었던 울 엄니]

울엄니가 돌아가시기 전, 70대 후반 시절에 당신에게 누군가가 대놓고 "할머니"라 했다고 엄청나게 기분 상해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속으로 "아이고오~ 그 연세에 아직도 할머니라는 호칭이 소화가 안 되시오?"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있구나,는 생각에 엄니의 하소연을 접수한 뒤부터 나는 아무리 노인으로 보이는 상대라 해도 굳이 "아주머니"라 부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내가 겪어보니 이제서야 슬그머니 그 기분이 진짜로 이해가 가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할머니'라고 하지 '어르신'은 뭐지? 왜냐하면 내가 엄마가 됐고 그 아이가 결혼했다면 지금쯤은 할머니가 되었을 나이이니 그 호칭은 당연하지만 어르신이라... 이건 어쩐지 걷지도 못해 기어다니는 사람이 된 느낌 아닌가? 


요즘 같은 시대(100세 시대 그리고 젊음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공손하게, 예의 바르게 군답시고 대놓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놓아서 말 한 마디로 상대를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다니 듣는 어르신 기분 나쁘단 말이쥐이~ 

짧게 깎은 머리카락[염색에 실패, 빨간 머리카락이 됐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이런 호칭이 대중적,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IMF 전후로 서비스 개념이 지나치게 강화 되면서 존댓말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뒤따라서 이 '어르신'이라는 호칭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듯하다

존대의 개념이 무너졌다는 내 말은(이건 꼭 한 번 짚고 싶었다)

"손님이 갑이다"를 모토로 하는 서비스 산업이 발달해 사람들이 친절해지다 못해 물건에게까지 존대를 하는 기이한 현상을 말 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21번 손님, 카페라떼 나오셨어요~" 이런 거다. "전화를 하셨어요"가 아니라 "전화가 오셨어요" 등, 일일이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요즘은 방송에서 스스로에게 존댓말을 쓰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지경까지 왔으니 이대로 엉터리 어법이 굳어질까 두려울 지경이다 --;;

백발의 서양 할머니[이런 할머니도 '어르신' 하면 싫어한다]

더불어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 했다고 할까, '어르신이라 할 만하니 했겠지' 받아들이면 될 걸 기어이 뛰쳐나가 머리카락을 박박 밀어버리고 염색까지 감행하다니 외모 뜯어먹고 살래? 그래지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어찌 보는가에 무심한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상,

지나친 존칭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어법 자체가 무너지는 존댓말은 기본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감을 준다는, 불편한 하소연이었다 - 남성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여성이 할머니로 보이면 "어르신' 대신 '아주머니~'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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