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오른 삶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

VOD로 무료영화를 보다가 주인공이 비행기에 앉은 장면에서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다.  '비행기'라는 물리적 공통점 외에는 어떤 연관고리도 없는 장면인데 말이다.


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면서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에 대해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고 덩달아 생각했던 여파인가 짐작을 한다. 그래서 이맘 때면 '나는 무엇을 따뜻한 추억으로 가지고 있을까' 의식적으로 되짚어 보지만 안타깝게도 억지로라도 떠올릴 만한 것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서글픔만 매 년 쌓아가고 있었는데, 각설하고 

이륙 후 내 자리를 떠나 화장실 가까운 거의 맨끝 줄에서 4개의 좌석이 주루룩 빈 것을 확인하고 얇다란 비행기용 담요를 덮고 길게 뻗어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 22번, 나는 대한민국 대구 또는 서울에서 오스트리아 Wien을 오가는 비행기를 탔다 - 그 중 자진해서 탄 것은 맨 처음과 맨 마지막 (이 문장에 숨겨진 행간을 의식하면서 "유치해!" 스스로에게 일갈한다) 


그러던 중 어느 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Wien으로 가던 비행기(KLM또는 Lufthansa였다 - KAL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 하는 중)에서 잠이 자고 싶었던 나는 이륙 후 내 자리를 떠나 화장실 가까운 거의 맨끝 줄에서 4개의 좌석이 주루룩 빈 것을 확인하고 얇다란 비행기용 담요를 덮고 길게 뻗어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얼마나 잤는지, 기내식은 꼬박꼬박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잠시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면서 잠에서 깼다.


"아니 벌써?" 하며 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내가 누워있던 발 쪽의 좌석 등받이에 떡하니 꽂혀있는 팻말 하나를 발견했다

불현듯 떠오른 삶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

이 이미지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가 주를 이룬 팻말(?)의 내용은 대충 위 이미지와 비슷한 내용이었고 "아픈 사람이니까" 정도 되는 부연설명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순간 "뭐야, 누구?" 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모두 앉아있고 방금 전까지 뻗어있었던 걸로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 - 나???


왜, 내가 아파 보였나? 설마 아파 보였을 리는 없고 (그랬더라면 깨워서 괜찮으냐고 물었겠지) 내가 너무 곤히 자 불쌍해 보였나? 아님 내가 좀 예뻐 보였나? - 우습지만 하도 뜻밖의 상황이라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빈 자리 막 많은 비행기도 아니었기에 내가 특별대우를 받은 것만은 분명해 누가 내게 이런 친절을 베풀었을까, 눈웃음이라도 지어줘야지, 눈에 띄는 승무원들을 일일이 살펴도 내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 누구라도 "잘 잤니?" 해 줬으면 "아, 너였구나" 했을텐데.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감사함의 눈웃음을 보일 수 없었고 왜 그런 팻말이 내 발치 등받이에 꽂혀있었는지 이해도 못한 채 비행기에서 내렸지만 뭐지 이건? 어쩐지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하고 낯설은 따뜻함 


아마도 그로서는 직업정신에서 우러나는 친절함으로 무심히 건넨 배려였을 수 있겠지만 당시 나이가 30이 가까웠음에도 "생색 내지 않는, 부담 주지 않는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는 물음표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배려였다. 그리고 그 물음표와 함께 둥둥 떠다니는 솜구름 같이 포근 따뜻했던 느낌도 몇 주에 걸쳐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었다


이 기묘한(?) 경험이 내게는 일말의 대가도 없이 받은 순수한 배려 또는 보살핌의 유일한 기억이다, 핏줄까지 모두 통틀어 그렇다 - 60 가까이 살았는데 내게 어마어마한 은혜를 베푼 사람, 좋았던 것으로 추억할 만한 순간들이 한 둘이었을까만 다 제쳐두고 이 작은 기억이 두고두고 "내 생의 가장 따뜻했던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어쨌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내게도 붙잡고 떠올릴 만한 따뜻한(보살핌 받고 배려 받은) 기억이 하나 정도는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 그리고 내게도 죽기 전에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을 선물할 일이 한 번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암병동에서 만난 청소년에 속하는 여자 아이가 담배 한 가치를 요청하자 주인공이 묻는다

"너 담배피울 나이나 되는거니?"

"그럼 내가 죽을 나이는 됐다고 생각해요?"

포스트 내용과 관계 없는 엉뚱한 얘기지만 지금 보는 영화에서 이 대사 참 좋다, 삶과 행복 그리고 존중을 간결하게 설명 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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