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책이다.
이렇게 금새 다시 나머지 일을 시작하게 될 줄 몰랐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일은 시작 돼 있었고 그렇게 어쩌다 시작 된 일이라면 대개 일사천리로 숨 쉴 여유도 없이 끝나 있어야 일반의 정서에 맞지 싶은데 이틀이나 걸리게 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 하지만 느리게, 무심하게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꽤 마음에 든다
경철 고양이가 위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라 뒤로 보이는 책장과 벽이 주인공이다 (경철 고양이는 현재 컨디션이 몹시 나쁘고 집사는 여태 어찌어찌 잘 견뎌 왔는데 여차하면 병원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매 번 그렇지만 역대 급으로 떨고 있다)
풋! 이 고양이 좀 보소, 나는 늘 철수 고양이가 좀 사람 같은 느낌인데 그래서 늘 좀 사람같이 대하는데(그래서 늘 좀 미안함 --;;) 이럴 때는 여지없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하듯 책 담아 버리려고 가져 온 상자에 제가 먼저 냉큼 들어앉아 "이게 무슨 사진까지 찍을 장면이야?" 하듯 건너다 본다
"흥. 칫. 뿡. 내 상자다 머!" 하는 표정 - 사실 제 상자이긴 하다. 화장실 방에 놓아준 것인데 전혀 들락거리지 않길래 책이랑 같이 내다 버리자고 갖고 왔으니
우리 집 가필드와 만화 가필드의 콜라보 - 우리집 가필드건 만화책 가필드건 가필드는 무조건 버리지 않는다
옛날, 아직 공부 하던 시절에 현지어로 된 책(?)이라고 사 볼 엄두를 낸 건 이 시리즈가 처음이었다.
먼저 시작해 먼저 (내게 비해 훌쩍 먼저)공부를 끝낸 언니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혈혈단신 혼자 남겨졌던 시기라 무엇으로든 그 허전함, 외로움을 채울 필요가 있었고 기특하게도 '리브로'라는 문방구 겸 서점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던 탓에 당시 내 수준에 맞는 이 코믹스 시리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사전 찾아 이해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혼자 낄낄 웃으며 결핍의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고 이 후로 원어로 된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게 한 계기가 돼 당연히 어학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고양이 가필드 시리즈는 내 인생의 '책'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인쇄물, 소책자 형식으로 자세하게 편집 된 지도다 - 말을 좀 할 줄 알게 되면서 벼룩시장 같은 정보지 'Bazar' 피아노 레슨 광고를 내 - 우리나라 등의 정보지보다 비교적 더 공신력 있고 안전한 편이다, 물론 전화를 걸어와서 '너 그럼 아시아식 마사지도 해주니?'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도 있었지만 - 여기 저기 수업을 하러 돌아다니게 됐을 때 샀던 것이다
늘 가방 속 한 켠에 자리 잡았던, 요즘의 스마트폰보다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물건이었다 - 이 두 가지 출판물은 돌아올 때 배나 비행기로 부치지도 않고 수하물로 직접 갖고 들어올 정도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애착이 생긴 것들이라 아무리 지우고 비우고 가벼워지자 한들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러다 제 풀에 지쳐 하루를 보내고
어제인 금요일 - 역시 그저께처럼 중간 과정은 생략, 책에 들인 돈과 기억들이 아쉽긴 했지만(전공 서적들은 한 마디로 비싼 것들인데...) 여러가지 만들기에 관한 책들과 위에 언급한 두 가지만 남기고 내놓은 다음에 역시 곰팡이 작업과 퍼티 작업을 하는데 그저께와 마찬가지로 7시간 가량이 걸렸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나니 연일 무슨 일인가 불안 했던지 평소보다 얌전히 엎드려 긴 작업을 지켜보던 고양이 형제, 비로소 여기 저기 냄새를 맡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덜 마른 퍼티가 아이들에게 묻을까 긴장 했지만 회반죽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던지 묻을 만큼 가까이 가지는 않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저녁에는 언니가 보내온 반찬 중에 고추찜이 있어 그렇잖아도 땀 흘려(곰팡이, 퍼티 작업 할 때 땀을 수도꼭지처럼 흘렸다) 짠 것이 당겼는데 잘 됐다! 밥은 귀찮고 고추찜과 맥주 한 잔 - 그런데 우리 언니, 동생 챙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더운 날 내 조카에게 심부름 시키는 것 나는 별로다!
같이 찍힌 전화기를 보니 오후 8시 39분인데 기온이 32도다 - 이렇게 또 한 자락이 지워지고 비워지고 가벼워졌다. 성공적인지는 세월이 좀 더 흘러봐야 알겠지만 아직 대기하고 있는 50리터들이 쓰레기 봉지가 11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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