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들은 뭐 원래가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동물이라고 불과 어제의 포스트에 적었지만 사람과 사는 경험이 쌓이면서 거의 무작정의 공포나 의심 등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내 고양이 형제 또한 그러려니 막연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나이가 8살이 다 돼 가는 내 고양이 형제가 설마설마 했던 실체를 또 다시 드러내고 말았다.
내 인터넷 환경을 굳이 세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티비를 켜면 화면이 이렇게 나오기 시작한 것이 2, 3주 가량 됐다. 셋톱박스의 전원을 올렸다내렸다 몇 번을 반복하면 우연이듯이 정상적인 화면이 잡히는데 사람 드나들고 어수선한 것이 세상 무엇보다 싫은 나는 한 때 전파가 나빠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다 나아질 때도 있으니 꾹꾹 눌러 참다가 어제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해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고 오늘 기사 아저씨가 오신 것이다.
아저씨가 들어오시고 아이들은 예사로 저 있던 자리에 한참을 유유자적 있는듯 보이더니 갑자기 푸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 아저씨가 "어이쿠, 이거 뭐고?" 놀라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 그런데 야아들은 왜 금새 달아나거나 숨지 않고 몇 분씩이나 간을 보다가 갑자기?
일단 현관문 단속이 잘 됐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집에 무엇인가 어수선하게 사람들이 드나들 때 집사들은 현관문 단속을 철저히 해야한다. 고양이란 어수선한 사이에 그 낯설고 두려운 상황을 피하려고 현관문으로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아이들 행방을 찾으니 침대 밑에 이러고 있다. (경철 고양이는 철수 고양이 머리 쪽에)
"철수야, 철수야~" 최대한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부르니 "니 누구야?!" 제 애미도 몰라보는 눈빛을 하고 겨우 돌아본다. 이거이거 만날천날 제 동생 두들겨 패고 물어뜯는 그 대장 고양이 맞나? - 사실 집사는 이 순간부터 소심한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속이 상하고 미리 격리하지 않았던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철수보다 백 배는 더 소심한 경철 고양이, 기사 아저씨가 이것저것 만져 보시다 장비를 가지러 나가시니 침대 밑에서 인간들의 발 움직임으로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던지 스르륵~ 연기가 피어오르듯 느리게 떠올라 집사마저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낸다
- 어째 이럴까, 병원 갔을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낯선 사람 손길에 아이들을 맡긴 적이 없는데...
이제부터 두려움에 시달리는 고양이의 전형적인 자세가 낱낱이 드러난다 - 일단 방 안에는 낯선 사람의 그림자가 더 이상 안 보이니 이제는 바깥이 안전한지 살핀다
아주 바깥을 살피러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방 안이 안전한지 확인을 하고 - 저 자세 봐라, 저렇게 배가 땅에 붙을 만치 겁이 나면 차라리 가만히 숨어 엎드려 있등가... (이 부분이 고양이의 호기심이다. 두려운 딱 그만치 호기심에도 시달리는 것이 고양이 삼신이라)
오금 저려 똑바로 설 수도 없지만 기사 아저씨가 작업 하던 장소도 한 번 스윽~ 살피는 걸 빼 놓을 수 없다 - 다행스럽게도 경철 고양이가 방을 완전히 나가 부엌을 거쳐 작은 방 가까이로 가는 순간 아저씨가 돌아오셔서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고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순간부터 아저씨가 일을 끝내고 가실 때까지 콧구멍 만한 집구석에서 아이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도 참! 하얀 털에 파란 눈을 한 고양이를 보고도 "아이고 예뻐라~" 한 마디 안 하시니 섭섭 하디라... --;;)
경철의 용기에 덩달아 나와보려던 철수도 또 다시 있던 자리로 꽁꽁, 다시 바구니 뒤에 얼굴을 숨겼다
그나저나 경철이는 도대체 어디 숨었노, 현관문은 또 다시 확인했으니 나갔을 리는 없고 평소 잘 가는 장소, 어둑신한 장소 등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30여 분 후에 작업을 마친 기사님이 철수를 하고 마음놓고 경철아, 철수야를 부르며 찾아다니다 우연히 한 구석에서 발견한 희끗한 솜뭉치 하나 - 이제는 뚱뚱해져서 몇 년 새 절대로 들어갈 꿈도 꾸지 않던 피아노와 피아노 의자 사이에 구겨져 들어가 있었던 것. 좁디 좁은 작은 방에 피아노와 책상 사이에 빨래 건조대까지 놓아 치렁치렁, 시야가 거의 완벽하게 가려지니 저로서는 최선의 은신처를 찾은 셈이었다 - 신박하다 고양이!
"경철아, 아저씨 갔어, 이제 나와~" 마치 들리기라도 하듯 그나마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문 열고 닫고 등의 진동과 공기의 흐름으로 아저씨가 가셨다는 걸 나름 눈치 채고 있었을 게다
그래도 여전히 "집사도 못 믿는다!"
의심, 두려움, 호기심 - 어쩌면 고양이가 이리도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도저히 오금이 저려 안 되겠는지 중간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집사에게 여전히 낯선 눈빛을 보낸다
안방으로 돌아와도 여전히 남아있는 낯선 아저씨의 냄새
수상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제서야 인정이 되는지 눈빛 달라졌다 - 샤꾸야, 니 그래봤자 종이 호랑이란 걸 오늘 내가 단디이 알았네라!
"아니오, 아니올씨다! 그 아저씨가 워낙시 수상 했더랬소!" 아닌 게 아니라 낯선 사람이 와도 아이들 반응이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데 이 번에는 좀 유난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실적으로 풀이를 해보니 요 몇 년 새 급격히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 잘 하면 한 달에 두어 번 즈들 큰이모를 보는 것이 전부니 낯가림이 심해질 법도 한 일이다. (이 고양이들은 가족을 알아보는지 어릴 때부터 내 핏줄이 오면 그리 심히 낯가림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대장 고양이 철수, 경철이는 이미 사건 접수, 수사까지 모두 끝냈는데 이제서야 슬금슬금 그야말로 "기어"나온다
이 녀석이야말로 정말로 종이 호랑이라, 평소의 성격이나 행동으로 보면 이 꼴이 도무지 실망스럽고 안스럽고 미안해서 또 한 번 속이 상한다
다 나오기 전에 아저씨가 작업하던 자리 한 번 스윽~ 검사하고
무엇 하는 어떤 사람이 왔다갔나 냄새로도 점검하고
여전히 겁 먹은 자세로 집사까지 확인 한 다음에
바깥을 스윽~
"그 아저씨가 저기서 무얼 했지?" 컴컴한 데서 얼굴도 안 보이게 숨어 있어놓고는 아저씨 손 길 발 길 간 곳은 모두 알아차리고 점검을 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넘들
시차는 있지만 두 녀석 모두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 - 수상한 것이 지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집안 전체를 검사한다. 즈들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덜 당당하게, 슬금슬금~
아저씨가 가고 나서 아이들이 진정 될 때까지 다시 30분이 걸렸다 - 무려 한 시간은 세상 없는 공포에 떨었던 것이라 미리 격리 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게 화가 나고 드나드는 사람 없어 저런 성격의 아이들로 자랐다는 생각을 하니 내 특수한 환경은 더더욱 미안하고...
고양이들도 사람 아이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서 집사의 성격을 닮아가고 저 사는 환경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데
내가 아니었으면 좀 더 밝고 담대하게 많은 것을 즐길 줄 알며 살았을까... 멀쩡한 고양이들을 내 환경적 특수성 때문에 종이 호랑이로 키운 것 같아 마음이 아픈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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