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을 피했더니 여우가 나타났다?

'여우를 피하면 범을 만난다'의 순서가 맞나?

모르겠다, 걍 쓰면 되지 머... 아무튼 내 입장에서는 범을 피했더니 여우를 만났나 싶은 상황인데,

[숨숨집 속재료로 쓰일 종이 상자]

내 친구네 아깽이 구찌에게 보낼 숨숨집을 만들 속상자이다. 그런데?

[까꽁~ 눈웃음을 지으며 철수가 나타난다.]

빈 상자가 아니었다. 철수가 박스 안에 들어앉아 있다가 사방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얼마 되지 않아 고개를 내밀고

[상자 속에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는 고양이 철수]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다.  고양이가 상자 속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것이 어째 이야깃거리인고 하니,

[집사가 작업 중인 물건 위에 올라앉은 철수의 불만 가득한 표정]

그것이 언제, 누구를 위한 것이건 상관 없다, 철수는 집사가 지끈질을 하면 그 꼴을 절대로 못 봐한다. 오늘 아침에 아깽이에게 보낼 숨숨집의 벽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언제나처럼 그 안에 들어앉아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면서 방해를 한다. 아, 이 벽은 다른 물건들보다 월등히 길기 때문에 철수가 기대어 무게를 받으면 자칫 무너지기 십상이라 이 녀석을 여기 못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 이른바 범을 피하기 위해,

[저 박스 위가 안전한지 확인도 않고 뛰어오른 철수]

아예 바구니 속에 속상자를 넣어서 작업을 하면 철수가 바구니 안에 들어앉는 방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상자를 넣었는데,

여우를 만난 것이다! 사실 겉포장으로 쓰일 바구니는 작업대 위에 있고 그 위에 40cm의 박스를 얹으면 족히 70~80cm의 높이라 고양이의 시야에서는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서 뛰어오르지 못하리라는 것이 집사의 얄팍한 생각이었는데

[어제 들어갔던 익숙한 상자임을 알고 있는 고양이 철수]

철수에게는 이미 작업대도 익숙하고 어제 이미 들어가봤던 상자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가운데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는 것도 알고서 가장자리로 훌쩍 뛰어오른 것이다. 바구니에 상자를 넣자마자 이 꼴을 당한 집사는 그야말로 망연자실, 범을 피하려다 여우를 만났다... 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집사의 당황스러움은 안중에도 없는 고양이 철수]

자, 이제 마법 한 번 보여줄까?

[고양이가 상자 안으로 사라지는 마술]

1. 자, 이제부터 종이박스가 고양이를 흡입합니다~ 

2. 조금씩 상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고양이 철수

3. 꼬리를 흔들며 bye~ 하는 고양이

4. 상자가 고양이를 완전히 삼켜버렸습니당~

[다시 까꽁~]

젠장, 이건 까꽁이 아니라 메렁~ 임에 틀림없다. 고양이가 키대로 서서 이 정도 높이이면 나오기도 힘들지 싶은데

이 녀석은 여유만만 상자 안에서 보는 바깥세상은 어떻게 다른지 구경 삼매에 빠졌다가

[끙차! 상자를 두 손으로 상자 윗부분을 짚고 빠져 나오는 철수]

깊은 상자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몸소 보여주신다. 

[어느 새 상자를 탈출한 철수]

그러니까 이 녀석에게는 상자에 들고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었고 집사만 나쁜 머리 굴리다가 한 방 먹은 것이다. 상자를 넣고 겉을 짜면 훨씬 더 힘든디, 게다가 수시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고양이까지 함께 넣어서 짜야하는 신세라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솜을 지고 가다가 일부러 물에 빠진 당나귀 꼴이 됐다고나 할까 ㅎ;;

[집사와 눈이 마주치자 외면하는 고양이 경철]

그동안 경철군은 언제나처럼 제 형과 집사가 노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집사와 눈이 마주치자 후딱 눈길을 피해 버린다.

[졸리는 척 연기하는 고양이 경철]

왜인고 하니, 바로 아침밥 먹은 후 약 먹는 시간이었고 약은 이미 테이블 위에 준비돼 있던 상황인 것을 이 녀석도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단잠에 빠진 철수]

위의 상자 드나들기 놀이를 정확하게 세 번 반복한 후 드디어 집사 손에 잡혀 약을 먹고 단잠에 빠졌다. 저도 나름 뛰어올랐다, 내려갔다 다시 탈출하고 등등의 과정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 손으로 침구를 꽉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사진을 연발로 찍어대니

[나란히 잠에 빠진 고양이 형제]

철퍽철퍽하는 셔터 소리가 거슬렸던가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잠에 빠진다. 인간이 사진 찍는 포인트가 무엇인가까지 잠결에 알아차리는 듯하니 나는 정말이지 범을 피하고 여우를 만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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