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지영이 가족의 여름 나기

좀 전에 지영이가 쓰레기가 든 봉지를 입에 물고 오는 걸 목격했다. 언뜻 보기에 오렌지 껍질과 티슈 뭉치가 들어있었는데 내가 주는 밥이,

아무리 엘라이신 덩어리지만 고양이들이 싫어해 마지않는 오렌지 껍질보다 못했던 것이냐? 몹시 서글다, 배반감과 염려와... 많은 것들이 범벅이 돼.

길고양이 밥을 안 먹고 애 먹인다

아침에 이런 모습으로 앉아 들여다보기만 하고 가더니 지금도 밥을 이윽히 건너다 보고만 있다.

창 아래에 던져 준 길고양이 밥

창 가까운 곳에도 잘 찾아 먹길래 그 곳에 놔 준 것도 그대로, 틀림없이 다시 임신을 했을 테니 잘 먹어야 한다고 좋은 것들만 버무렸는데

밥맛이 없어 서러운 길고양이 새끼들

모두 이렇게 억울한 표정으로 있다가, 북어채에도 입을 안 대고 에옹에옹 아깽이들 울음소리와 함께 쓰레기 주으러 갔던 모양이다. 서비스라고 캣닢 묻혀 준 것이 싫었던 거라고 위로를 하지만 상한 마음이 오래 풀리질 않는다. 다시 내다 봐도 밥은 그대로다. 2012.07.22

 

그리고 5일이 지나 오랜만에 지영이 가족을 대면했다.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1

밥 준다고 문만 열면 나타나던 아이들이 한더위가 시작된 이 후로는 전혀 보이지도 울음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저녁 한 끼만 겨우 먹고 있구나 정도만 확인 할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문을 여니 저렇게 나타나 주기는 했다. 하지만 뭣 때문인지 저러고 퍼드러져서는 심지어는 가다랑어를 던져도 흘깃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2

빽빽 대던 지봉이 녀석도 밥 떨어지는 소리에 얼른 올라와 냄새 킁킁 맡더니 무려 가다랑어를 개무시하고 다시 빽빽대면서 담장을 타고 간다.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3

지영이, 하염없이...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4

"인간, 이게 최선이야?" 하는 눈빛으로... 그런데 지봉이 배(표시 해놓은 부분) 좀 봐라,  저렇게까지 쑥 들어가도록 곯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 저로서는 더위 밖에는 짐작할 수 있는 게 없다. 밥도, 싫어하는 사료를 되도록이면 적게 말아 거의 캔밥으로 주는데도 저 꼴을 하고 다니다니 지난 번에 나타났던 애비란 눔이 병이라도 옮기고 간 건지...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5

지안이, 나발이가 저 쪽에서 삐약대니 애미라고 연신 돌아봐 가면서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6

요냔아, 엘라이신 말아 준 밥 싫다고 굶어싸터니 그거라도 말아 먹었으면 이 더위에 견디기가 훨 낫지 않았겠니? 생고기를 주면 미친 듯이 먹어 치울 거라는 걸 알지만 뒷일을 어찌 감당할까 그 걱정이 앞서 선뜻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사실  딱 한 번이다 하고 닭고기를 줬다... 굶는 아이들에게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없다는 셍각에) 비용도 큰 문제지만 우선 살리겠다고 좋아하는 것만 먹이는 일이 한 편 야아들에게는 훗날을 내다 봤을 때 무책임하고 값싼 동정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7

지영이네가 사람 귀에 소리 없이 올 때는 언제나 우리 장남 고양이 철수가 저렇게 알려준다. 경계심도 호감도 서로 없어 보이지만 관심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2012.07.27

 

지영이네는,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난 시각에 철수의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 지영이 옆집 장독대 끄트머리에 또아리를 틀고 있어 틀림없이 어느 녀석이 밥을 먹는구나고 무작정 밥자리를 찍어 봤더니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8

봉지 세 개의 정체는 하나는 이틀 된 건사료 또 하나는 아침에 준 젖은 밥 나머지 하나는 즈 이모가 발라온 저녁용 닭살 최대 속도로 세 번 누르고 확인한 모습이, 지봉이 놈, 밥을 먹다 불빛에 깜딱 놀라 서둘러 수습하고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9

꽁지 빠지게 토끼는 중이다.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10

아침에 확인해보니 백숙에서 발라온 닭살도 약재 향 때문인가 딱 한 놈만 먹은 듯... 매달아 놓은 빗자루로 쓸어내고 다시 내려가서 다 치웠다. 지난 번 지영이, 우왕우왕 새끼 불러대면서도 연신 먹어대던 바로 그 밥을 다시 내려뒀는데도 아직 한 놈 밖에 다녀가지 않은 듯, 답은 생닭가슴 밖에 없는 듯 하다. 반성은 일단 살려놓고 해야지 2012.07.31

 

아무래도 구충을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미무취로 유명한 파나쿠어산을 생닭 300그램에 5그램 섞고 - 4마리 대충 7 내지 8킬로그램으로 보고 덜 먹을 경우를 대비해 좀 넉넉히, 정량의 천 배를 줘도 해가 되지 않는다니 - 언제 어떤 경우든 이것은 먹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사료 6그램(고기의 2% - 어제는 1%, 내일은 3%)
달아서 섞어 내려놨더니,

길고양이 가족의 힘겨운 여름 나기 11

2012.08.02 오후 7시 55분. 두 녀석이 와서 먹긴 했는지 봉지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어제는 두 봉지를 내렸는데 둘 다 물고 가서 먹었고  오늘은 구충제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에 줬던 인스턴트 닭가슴살이 더 마음에 들었던 때문인지... 나중에는 물고가서 먹었지만.

오후 8시 40분.밤이 지나는 사이에 먹어 치울 거라는 건 알지만,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게다가 정말로 까다로운 철수 경철씨도 아무 문제없이 복용한 무미무취한 구충제 때문에 생닭까지 멀리한다면 나도 이제 슬슬 지친단 말이지...


- 참고 : 파나쿠어산은 임신냥이게도 안전한 약물 -

 

여름에는 고양이들도 입맛, 기운 없어 고생 한다는 걸 모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밥에다가 캣닢이라니, 쌀밥에 초콜릿을 비벼 주었던 셈이다. 무식하면 용감 하다더니 그런 짓을 해놓고 저 더위에 비싼 밥 먹어주지도 않는다고 욕을 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 저 구리색 눈을 가진 지봉이가 얼마나 더 자라는지 그 과정을 얼른 되새기고 싶은 조급함이 생긴다.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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