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눈을 떠보니 내가 꽃길을 걷고 있더라(fit. 대장 고양이의 굴욕)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생에서 처음으로 곰곰히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됐는데, 2019년에 대한 한 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문득 눈을 떠보니 내가 꽃길을 걷고 있더라"로 굳어지고 있다. 


더 보탤 것도 더 뺄 것도 없이 잘 보낸 해였고 용케도 더 험한 길 잘 피해가며 꽃길만 걸어온 생이더라, 라는 생각을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오면서 처음으로 하게 됐기 때문에 내게는 특별한 연말이 가고 있다.

2012년 5월 22일 두 고양이 형제가 딱 한 살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2012년 5월 22일 두 고양이 형제가 딱 한 살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갑자기 경철이 제 형에게 그루밍을 선물하기 시작한다 - 그루밍을 원래 윗고양이가 아랫것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올 정도라면 당신의 2019에는 정말 좋은 일만 있었겠다? 귀인도 만나고 돈도 많이 벌고 잃는 것도 없고  등등~

심하게 놀라는 눈빛을 하는 진짜 대장 고양이[허걱! 네가 왜 내게 그루밍을 해, 내가 대장인데?! - 심하게 놀라는 눈빛을 하는 진짜 대장 고양이]

천만에! 모든 것이 다 거꾸로다. 나쁜 일이란 것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부터는 끊임없이 더 많이 생기게 돼 있는 것이 순리이고 (나이가 들면서 질병, 가난, 죽음 등을 더 자주 접하고 듣게 되니까) 나 또한 좋은 일, 좋은 소식이라고는 별로 없는, 게다가 꼴랑 세 식구에 셋 모두 질병에 시달리는 한 해를 보냈다. 


게다가 한 6개월 간 내 발로 똥통인 줄 모르고 뛰어들어 경험한 세상이 가관이었다. 더불어 내 꼴이 얼마나 가관일 때가 있는지도 객관적으로 보는 기회도 많아졌다 - 그런데 그 세상이 내가 얼마나 등 따뜻하고 배부른 온실 속에 살고 있었고 살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1. 당연히 지난 시간에 대한 원망, 불만, 자책 등이 사라지는 효과가 있어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지더라는 것. 그리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해 세상은 죽을 때까지 다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말로만이 아니라 체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대장 고양이의 경고[깜짝 놀란 대장 고양이 - "야, 하지 마라이~" 조용히 경고한다]

나도 위에 철수 그림처럼 "야, 하지 마라이~"도 해 봤지만 사는 일에는 정당도 부당도 정확히 선을 그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 또한 그 새로운 세상을 접하면서 알게 됐다. 젊을 때는 부당함이 득세하면 미친듯이 날뛰기도 했지만. 

2. 이제 내 마음에 상처날 일이라면 맞서지 않을 줄 아는 이기심도 어느 정도 장착이 된 것 같다 - 이것은 이기심이라기보다 "자기애"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형의 경고에도 계속해서 그루밍을 선사하시는 경철 고양이[형의 경고에도 계속해서 그루밍을 선사하시는 경철 고양이 - 이 끈질김에 대장 고양이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 두 고양이들의 병과 스스로의 다 말하고 싶지 않은 병들을 겪으면서 평범한 순간순간이 새삼스레 고맙게 느껴지는, 이것은 그냥 말로 "깨달았다"가 아니라 순간순간 몸으로 느끼며 "감사하다, 경이롭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게 된 것이다.


내 손으로 밥 먹을 수 있고 신체에 큰 고통 없고 병이 생기면 병원에라도 갈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평범하지만 고통을 견뎌본 사람은 안다. -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밥도 굶어본 사람이 고통을 알듯이 내가 모르던 많은 고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 인정하게 된 것이다.

3.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듯한 이 평범함과 당연함을 글이나 말로만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과 순간순간 느끼는 것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더라. (이것이 2019의 가장 큰 수확이다 - 하늘 아래 당연한 것은 없나니)

잘 생긴 대장 고양이의 굴욕[ㅍㅎㅎ! 이 장면을 못 봤을 리가 없는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웃음이 터진다 - 대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일방적으로 들어오는 그루밍에 결국 잘 생긴 대장 고양이의 굴욕?]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나의 굴욕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실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도 속속들이 깨달았다. 즉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아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객체로 볼 줄 알게되는 능력이 더 생긴 것이다.

4. 결국 나를 좀 더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게 돼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지"라는 말도 할 줄 알게 됐다. 더불어 나 좋자는 적당한 뻔뻔함도 함께 장착이 됐다.

시선 위에 있는 장난감을 획득하려고 두 발 서기를 한 귀여운 내 고양이[시선 위에 있는 장난감을 획득하려고 두 발 서기를 한 귀여운 내 고양이]

이건 좋지만 내 것이 아니야, 저 곳에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 뭐라고 할까, 몹시 갖고 싶었던 물건을 드디어 택배로 시켰지만 이제나 저제나 하며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며 "마이 컸네~" 라고 느끼는 -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이해가 쉬울까.


경철 고양이처럼 순수한 바람이면 귀엽기나 하재. 인간의 욕망이 바닥까지 가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또한 피부로 느꼈던 2019년이었다. 내 걸 뺏으려 덤비면 차라리 마음 편히 그냥 주면 된다. 

5. 올 것은 저절로 오고 갈 것은 저절로 가고를 깨달으면서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가 안(덜) 나게 됐고 샘이 나는 걸 참는 것이 아니라 샘이 나지 않게 됐다. 

찹쌀 싸래기 20kg을 번쩍 들어 옮겨 보겠다는 철수 고양이[막걸리도 담그고 떡도 해먹으려 산 찹쌀 싸래기 20kg을 번쩍 들어 옮겨 보겠다는 철수 고양이]

고양이가 20kg짜리 물건을 들어올릴 수 없다고 저 고양이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나도 늘 완벽하거나 늘 총기 있거나 늘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죽어지면 내 뒤에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남겨질지 나는 이미 "고기" 또는 "재"가 돼 있으니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 나를 화장한 뼛가루를 변기에 내린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6. 죽음 뒤의 "나"를 자각하고 강박 없는 일상을 살게 됐다.

꽃향기를 맡는 고양이[노란 프리뮬라에서는 후리지아 향기가 난다 - 천 원 한 장으로 쏠쏠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결론 : 꽃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꽃길인지 모를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한 바퀴를 돌아와보니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꽃길이더라. 단돈 천 원짜리 프리뮬라에서 뜻밖에 후리지아 향을 발견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일상에는 매 순간 묻어나는데, 저 꽃집 주인조차도 프리뮬라의 향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일상에 녹아있는 보석 같은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더라 -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누릴 줄 알게 된 2019는 참 잘 보낸 고마운 한 해였다. Ad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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