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냉동인간이구나

우체국에 가야만 보낼 수 있는 물건이 있어서 정말로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후 처음이니까 이십하고도 수 년이 지나 오랜만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찾아간 우체국에서 "아, 이것이 냉동인간이구나!"를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일이 있었다


사실 걸어서 10여 분 남짓 거리인 우체국까지 가면서도 "걷는 게 왜 이리 어색하지?"라고 느낄 정도였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냉동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냉동인간 1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저께 완성한 이 가늘은 지끈으로 짠 바구니를 포장재로 쓸 비누를 잘랐다

내가 만든 비누

작년 3월 27일에 대나무통을 숙성용기 삼아 만들어 거의 7 달이 지난 10월 18일에 통에서 꺼내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인데 잘라보니 속은 아직도 덜 말라 사진에는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가운데 쪽으로 갈수록 묘한 노란색과 녹색의 느낌이 짙어지는 것이 유황온천에 삶은 달걀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사실 나는 유황온천에 삶은 달걀 따위 본 적도 없는데 그냥 그리 느꼈다 - 한 마디로 아직도 건조가 덜 된 것이다

귀여운 도장을 찍은 수제비누

덜 말랐어도 어쩔 수 없다, 일은 마음 먹고 시작했을 때 계속 진행 해 마무리 해야지 다시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 시작하면 중간에 무슨 마(魔)가 끼어 일을 방해 할지 아무도 모른다. 세월이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났으니 충분히 숙성 됐으리라 믿고 오랜만에 비누 도장도 찍어본다 -내 도장이지만 철수를 모델로 한 이 도장, 진짜로 귀엽고 우리 세 식구 이미지에 어울리는듯! ^^-


이렇게 해서 어찌어찌 비누를 바구니에 담고 나서 보니 어라, 포장할 박스가 없네? 집안을 구석구석 열 바퀴 스무 바퀴 뒤져도 적당한 박스가 "나 여깄소!"라고 손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있는 박스 이리저리 재단해 맞춰 넣는 수 밖에!


사진은 없지만 나쁜 머리 굴려가며 이리 자르고 저리 자르고 테이프 이리 바르고 저리 바르고 투덜투덜 나쁜 머리 욕 해가며 족히 한 시간은 걸려 바깥 포장을 마친 후 

잠 자는 고양이 형제

아이들 이렇게 제 자리에서 자는 모습까지 누차 확인한 후 어색한 걸음걸이로 우체국으로 향했던 것 (우체국 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 같은 일)

우체국 택배 상자

그런데 우체국에 들어서자 마자  한 쪽 구석에 똑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것이 뙇! - 하아, 이건 또 머시냐? 이런 것이 3, 4십년 전에도 물론 있었지만 지방의 중앙 우체국에나 가야 있던 것이 요즘에는 동네에 창구가 겨우 세 개 밖에 없는 우체국에도 있었단 말이냐?


청원경찰인지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맹하고 멍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다가와 "도와 드릴까요?" 한다. "저 이거 비행기로 보낼건데..." 하며 엉망진창 짜집기로 만든 내 박스를 내미니 "이거..." 하며 잠시 말문이 막혀 하더니 "튼튼하게 포장 하셨지요?"며 송장을 내주신다.


그 사이에 내가 빠르게 생각하는 것 - 아, 아까 걸음걸이가 어색하다고 느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세상 고집불통 변하지 않기로 유명한 공공기관이 이 정도라면 e mart는 costco는 또 얼마나 변했을까, 적어도 5년은 가보지 않은 그런 곳들의 변화가 급 궁금해지면서 "그랴, 내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냉동인간이구나~" 실소가 터졌다


그래서 부끄럽냐고? 한 개도 안 부끄럽다. 어차피 내 박스는 저 샘플 중에 비슷한 사이즈도 없었기 때문에 미리 포장하지 않았더라면 적당한 사이즈 고르느라 또 한참을 난감해 했을테니 잘 한 일이다 생각한다. 다만 내 박스를 받을 분이 제대로 풀어 내용물을 무사히 보려면 미로찾기에 버금가는 박스 해체술을 발휘 하셔야 할 것이 마음에 걸릴 뿐 --;;

노점에서 산 부추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우체국을 돌아나오는 대로변에 얼굴과 머리카락에 세월의 훈장을 달고 있는 할머니들이 일렬로 앉아 직접 기른 것이든 어디서 떼온 것이든 상관 없이 뻐얼건 다라에 갖가지 채소들을 담아놓고 손수 다듬어 가며 팔고 있는 바로 그 풍경이다. 하루가 다르게 숨 가쁘게 변해가는 우리나라 풍경 중에서 드물게 고집스럽도록 변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것이지 싶어 익숙하고 편안해진 나는 저절로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나란히 앉은 두 할머니가 나란히 똑같은 물건을 내놓고 있다. 이 정도면 할머니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서 상당 품목은 떼와서 텃밭 농사라고 우기는 것이 틀림 없지만 이런 건 짐짓 모른 척하는 것이 서로의 정신 건강에 이롭다


오른쪽 할머니에게서 부추 한 단, 왼쪽 할머니에게서 정구지 한 단을 샀다 -정구지는 부추의 경상도 사투리로 알려지 있지만 사실은 한자어다. 그리고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는 부추를 '줄' 또는 '졸'이라 하기도 한다 - 날씨가 너무 나빠 엄청나게 비쌀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깻잎 한 묶음까지 두 할머니 모두에게 지불한 금액이 도합 5천 원 (만 원은 쓸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은 내가 냉동인간이기 때문일까? 농민들만 죽어난다는 것을 새삼 실감) 가격을 보니 부추는 확실 직접 기르신 것인 듯한데 과연 두 분의 물건이 굵기도 길이도 달라 믿음직


밥도 잘 안 끓이는 인간이 저걸로 뭐 해 먹을 건지는 묻지 마시라, 나도 진짜로 모르니까

마른 오징어와 마요네즈

그리고 냉동인간의 변하지 않는 입맛 - 마른 오징어 구이에 마요네즈!  그리고 맥주 한 잔으로 브런치. 폼폼인지 봄봄인지 그 글도둑이 내게 남겨 준 것은 세상 듣기만 했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풍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겠다고 덜 부어오른 쪽으로 이 마른 오징어를 씹어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직은 몹시도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냉동인간에게도 든 대목이 있었는데 누구든 내 전화번호만 가지고 있으면 내게 자유롭게 카톡을 보낼 수 있다는, 사생활과 내 의견이 개무시 된다는 새삼스러운 진절머리 - 택배비 영수증을 카톡으로 보낸다는 너무나 당연한 듯한 창구직원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도착하는 영수증 카톡, 이런 거 정말 싫으다. 


지인이라면 누구나 쓰는 카톡을 안 쓰자니 불편하고 그렇다고 즐겨 쓰자니 삐끗만 하면 카톡으로 영수증이니 택배안내니가 날아들어 그런 안내, 영수증들 받고 즉시 그 방을 나가지 않으면 카톡에 쌓이는 채팅 방만 해도 수 백이 넘어갈 판이니 세상 조용할 날이 없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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