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아버지 기일

비누바구니 2021. 5. 3. 14:41

나를 길러주신 아버지가 아닌 낳아주신 아버지의 기일이다. 내가 진짜 나이로 1년 5개월 며칠 더 지났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무 기억이 없고 그 "존재"가 그립긴 하지만 그분 자체가 그립지는 않다.

[엄니의 허리 사이즈를 보건데 부모님의 신혼 시절이다 - 거의 70년 된 사진]

다만 해마다 기일이면 "기일"이다 생각하는 것이 전부이다. 제사를 지내고 산소를 찾고 이런 것을 배웠더라면 지금 좀 다를 수 있었을까 싶지만 내 나이 4살이 채 되기 전에 엄니가 재혼을 하셨기에 나는 살아계신 계부의 안녕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어떤 이는 한참 애를 먹이고 돌아다닐 때 이 분에게서 뺨을 맞았던가 어쨌다고 엄니가 돌아가신 후 완전히 안면을 바꿨고 나는 맞지는 않았어도 독하고 싫은 소리 종종 들었음에도 이 분은 여전히 내 아버지다)

 

늙은이의 눈으로 젊은(어린) 부모를 보는 마음이라니...

 

울아버지는 당시에 참으로 흔했던 연탄가스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셨다"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이 당시에 아버지는 대구 본가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사법고시 2차 시험을 공부하고 계셨고 엄니는 상주에서 역시 교사로 근무하고 있어 떨어져 지내는 상황이었는데 사랑채에 따로 기거하시며 밤새워 공부하시던 아버지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걸 알아차린 고모들이 흔들어도 안 일어나고 바지를 벗겨 *알을 확인하니 축 늘어져 있어서 "아이고, 죽었구나"며 그 방에 그대로 사람을 눕혀 놓은 채로 시신 염하듯이 솜으로 코 막고 입 막고... 나중에 내가 고모에게 왜 그 방에서 꺼내지 않았냐고 직접 물어보니 "몰랐다..."라고 얼버무림.

 

그래...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을까, 나중에 문교부 차관, 세계은행 고문관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직에 계시기도 했던, 당시에 외가에서 가장 스마트 했던 외삼촌이 "이 무식한 것들아, 느들이 죽였으니 느들이 내 매형 살려내라!"고 사돈에게 그야말로 개난리를 쳤던 심정도 날이 갈수록 점점 이해가 간다.

 

사진을 보면, 저 어린 것을... 싶은데 고모들은 점사를 보니 "내"가 잘못 태어나 집구석에 망조가 들었다고 ㅋㅎㅎ! 즈들이 죽여놓고 대뜸내 탓을 시작하더니 그런가, 그래서 내가 내 생애 중 45년을 소시오패스에게 일일이 말하기도 귀찮을 만큼 시달리며 살았던 것일까...?

 

아무튼 오늘을 내 아버지의 기일이고 나는 아직도 그 분이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고모들은 왜 그런 신파스럽고 무식한 짓을 했을까, 그리움 대신 삶은 신파이며 막장임을 새삼 느끼고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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