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형제의 화장실 이야기

고양이 배변

야생에서 고양이는 소변과 대변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보고 배설물을 그 때 환경에 따라 적절하게 잘 감추어둔다고 한다. 이런 습관으로 미루어 봐서 집고양이들도 만일 공간적인 사정이 허락 된다면 각각 다른 장소에 두 개의 화장실을 두는 것이 좋다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다묘 가정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아이들이 한 곳에는 소변을 한 곳에는 대변만 봐 놓았다고 왜 그럴까요, 하시던 글들이 생각 난다.


우리 집에는 위 설명과는 좀 다른 일이 있어서 화장실이 두 개가 됐다. 아이들이 이 모양으로 모래를 화장실 밖으로 던져대

고양이 화장실 사막화

화장실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하다가

새로 산 거대 고양이 화장실

이런 물건을 사게 됐다.


아침마다 컴퓨터를 켜면 어김없이 철수가 파고 들어와 골골송을 부르는데 새 화장실이 오던 그 날도 그런 녀석을 쓰다듬으며 괜히, 문득, 생각한 것이 "철수야, 내게 올 때만 해도 네가 왕초였잖아, 그런데 요즘 보니 아닌 것 같더라, 밥 양보하는 것도 나는 형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어쩐지 네가 눈치 보는 것처럼 보이고, 놀 때 목덜미를 깨무는 것도 언제나 네가 아니고 경철이잖아, 나는 고루한 할망구라 장남은 장남다운 게 좋고

막내는 막내다운 게 좋은데, 다섯째가 첫째에게 기어오르게 놔두냐...?" 대충 이랬었다, 절대 입 밖으로 소리는 내지 않았음.


그리고 내친 김에 아이들 서열정리, 그에 따른 행동적 특징들에 대해 검색질하다 뚜렷한 해답없이그냥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한 시간여 지났으려나, 택배가 도착하고 아이들과 지롤지롤 쌩쑈를 해 가며 풀고, 소독하고, 청소하고... 적응을 위해 기존 화장실 아래 자리에다 새 것을 두어 볼 일을 보려면 새로운 곳을 무조건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게 자리를 배치했다.

화장실을 둘러싼 두 고양이의 갈등

배치가 끝나자 바로, 경철이 마침 화장실을 가야만 했던 시간이라 이 녀석이 아래에서 모래를 몇 번 파헤쳐 보는 순간! 철수가 갑자기 와르르~하고 뛰어 들어 아이를 쫓는데... 위의 사진은 경철이 이미 기존 화장실로 몰려 들어간 상태이고 아래 사진은 그마저도 철수가 쫓아들어가 처절한 응징을 하고 나오는 장면. 철수 뒤로 불쌍한 하얀 것의 찌그러진 자세가 엿보인다.


경철이도 전혀 예상을 못했던 모양인지 지 형은 이미 나갔는데도 볼 일을 못 보고 혼비백산해서 화장실을 빠져나왔지만...

싸움에 진 고양이의 처량한 얼굴

저 얼빠진 표정이 다시 보는 지금도 가슴 아리다. 그래서 내 생각에, 철수가 새 화장실에 대한 맏형 우선권을 주장할 셈인가, 어차피 화장실도 두 갠데, OK, 그 정도는 존종해 주지, 하여 아래 그림처럼 두면 경철이가 기존의 것을 쓰고 욕심 부리는 철수가 그 곳을 지나 자신만의 영역으로 가겠지 해서 급 구조 변경을 했다.

화장실에서 싸우는 고양이 형제

그러나, 눈치없는 경철이 폴짝~ 새 화장실로 건너갔고 급기야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집사, 경철이 아앙~ 아앙~ 죽는 소리를 하는데도 싸움이 끝나고 두 녀석 모두 튀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내공을 보여주시고, 쫓다 쫓다 철수의 관심이 다른 데로 쏠렸을 때 쉬야 하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은 경철이를 번쩍 안아다 화장실에 넣어주니,


철수씨,

싸움 훌 혼나고 심기가 불편한 고양이

눈딱지를 이렇게 세모꼴로 만들어 덤벼들어... 집사 다시, 아이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기 신공으로 공격을 방해하여 경철이 무사히 오줌을 쌌다, 요 못된 눔의 눈딱지는 저를 닮아 그런 게 아녀~ 오줌 싸는 지 동생을 요따구로 노려보더래요....


서열이고 나발이고 다 때리치아라, 이누무 시키들앗!!!!!!!!!!!!!!!!!!


그리고 인간도, 말 뿐만 아니라 생각도 좀 조씸해서 허씨옷!!!!!!!!!!!!!!


당할 때는 하도 황당해 제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철수에게 열퐁, 열퐁 했는데 수습하고 나니 그게 아니더란 것. 고양이가 이유없이 영물이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라는 반성을 심각하게 한 날이었다.

2017년 8월 15일

저 메인쿤들이 쓰는 초대형 화장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저 날의 싸움은 내가 그럴싸 하게 봐 그랬던 것인지 진짜로 이야기가 저렇게 돌아갔으나 방정을 떨어댔던 나도 우습고 아이들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안스럽다.

 

이미 세 번째 카메라를 쓰고 있었나? 앨범을 들여다보면 당연히 알겠지만 귀찮다, 멀리 찾으러 나서야 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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