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타이밍이 완벽했다

새벽에 경철 고양이가 구토를 했다. 사실은 6시가 가까운 이른 아침이었지만 집사는 도무지 움직일 수 있는 시각이 아니어서 어떤 구토인지만 살펴보고 치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다시 잠이 들어 10시가 돼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경철 고양이가 씹어놓은 비닐 봉지]

잠결에 파악한 구토의 원인은 비닐조각이었다. 두어 달 전에 캣폴 기둥에 면줄을 감아주고 남은 것을 바구니에 담아 고양이들 손에 닿지 않을만한 곳에 보관 한다고 했는데 기어이 구석쟁이로 겨들어가 빠닥빠닥 저것을 씹어대다가 한 조각이 목으로 넘어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구토현장을 봤을 때는 비몽사몽 아무 생각없이 다시 잠이 들었다가 구토자국을 치우면서는 한꺼번에 이런저런 생각과 영감(inspiration)이 휘리릭 떠올랐는데,

[캣폴 기둥에 스크래칭 하는 철수 고양이]

고양이 형제가 평소에 오르락내리락 하며 캣폴 기둥을 붙잡고 봉춤을 추듯 스크래칭을 하는 장면과 (이 장면을 처음 인식 했을 때 기둥의 스크래처화를  성사시킨 집사 스스로가 개기특 했다 ㅎㅎ)

[스피커를 찍으려면서 포커싱은 저절로 저 쪽에 밥 먹는 경철 고양이에게 맞춘 집사]

사진에는 그렇게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소위 "체리나무 색"의 버얼~건 스피커가 늘 눈에 거슬리기도 했는데 저것을 변신 시키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체리나무 색의 낡고 오래 된 스피커]

몇 년 전에 하이파이 오디오 세트를 모두 철거하고 스피커 세트만 제 역할을 잃고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어왔는데 이것을 치우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화분 받침대로 딱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만에 하나 다른 환경에 살게 돼 하다 못해 FM라디오라도 다시 들으려나 하는 소망을 가지고 남겨 두었던 것인데

[스피커가 갑자기 제 자리를 이탈하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경철 고양이]

구토 자국을 치우면서 문득 든 생각이 "내 나이가 몇 갠데 아직 나중에 쓸 일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노... 이제 나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뭐든 버리며 살아야 맞지!"였다. 그래서 즉석에서 모든 것이 전광석화처럼 결정됐다.

[방 구조에 살짝만 변화가 생겨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 형제]

이 스피커에 저 남아돌며 울 시키 구토나 유도하는 면줄을 감아 수직 스크래처를 만들자는 것! 사실 이 고양이 형제에게 수직 스크래처라고는 한 번도 사 준 일도 없고 기껏해야 피아노, 가구 다리에 감아준 것이 소위 수직 스크래처의 전부였다.

[정말로 궁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철수 고양이, 귀여워~]

집사가 일 하기 좋게 스피커를 꺼내고

이쪽저쪽 쌓인 먼지들을 닦는 동안 고양이 형제는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여기저기 킁킁,

철수가 살피고 빠지니 경철이가 다가와 샅샅이 살핀다. 집사가 무슨 생각으로 이 거대한 것을 끌어내 쓸고 닦고 하는지 가늠해보려 애를 쓰는 모양이다.

[조그마한 변화에도 이렇게나 큰 호기심을 보이는 고양이들]

경철이 빠지니 다시 철수가 다가와 새삼스레 여기저기 살피다가

별 일 아니라는 판단을 했는지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스피커를 한 바퀴 돌아 빠져 나온다.

[개똥도 약에 쓸 일이 있다]

참말로 개떵도 약에 쓸 일이 있다더니 지난 밤 스크래처 마무리 하는 연습을 한 바닥이 스피커의 구멍에 딱 들어맞는다. 저기 구멍을 그대로 두고 감으면 그 부분이 쑥쑥 들어가 스크래칭 하기가 불편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이것저것 찾아 헤매지 않고 단번에 저걸로 막은 것이다.

쓰잘데기도 없고 연습도 끝났으니 그대로 버리려다 하룻밤 게으름을 부린 것인데 게으름이 다행일 때도 있구나 싶으다 ㅎㅎ~

[소박한 끈놀이에도 입을 딱딱 벌려가며 온 힘을 다하는 열정고양이 철수]

막간을 이용하여 철수는 면로프를 묶었던 끄내끼로 놀아주고

[늘 마음 한 구석을 찌르르~ 아프게 하는 경철 고양이]

그러는 동안 집사 코 밑에 껌딱지로 앉아 뭔가 저한테도 관심을 보여달라는 듯한 표정의 경철 고양이

[스피커로 만든 고양이용 수직 스크래처]

드뎌 완성이다! 바짝바짝 당겨서 감아야 했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했다.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했던 지끈 작업 때문에 아직도 띵띵 부어있던 손은 더 부었공 ㅜ.ㅜ 고무 장갑을 끼고 하면 마찰력 때문에 힘 쓰기가 용이해 손에 무리가 덜 가지만 그래도 역시 힘은 들었고 나중에 장갑 안에는 땀이 흥건했다.

[스크래처가 잘 만들어졌는지 검사하는 철수 고양이]

만들었다고 알아서 쓰겠지, 하고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다른 물건은 알아서 쓰지만 이건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스크래처라 고양이 형제가 미처 즈들 것이라 인식 못할 수도 있어서 집사가 손으로 빠득빠득하며 뜯는 시늉을 하니 철수 고양이 당장에 다가와 스크래칭을 하며 꼼꼼히 살핀다. (철수는 아기 때부터 집사가 손으로 무엇을 보여주면 그걸 그대로 따라하는 똑똑한 아이다^^)

 

아무튼 오늘은 경철의 구토로 시작해서 집사의 나이와 관련한 미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별 역할 없이 널부러져 있던 물건들을 유용하게 처리한 것 등 모든 것의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져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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