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 아이들과의 추억

놀라워라, 어미 고양이가 독립 시킨 제 아기를 대하는 모습

비누바구니 2020. 4. 17. 08:31

얼마 전에 대담하고 똑똑한 아깽이 까꿍이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창문 밖 아이들과의 추억] - 청출어람 일취월장 아깽이) 그 때는 어미 고양이인 지영이가 까꿍이에게 인간에게 밥 달라는 법을 가르치는 중이었고 2, 3일 안에 가르치지 않은 것까지 스스로 깨우쳐 오히려 인간의 걱정을 샀던 일화를 소개 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 후로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마침 어미인 지영이가 더 이상 쓰지 않아 더러워진 밥자리로 일부러 찾아와 밥을 달라길래 다른 때 같으면 밥을 챙겨들고 내려가 정식 밥자리에 줬겠지만 한참 이사 준비를 하느라 나도 어수선 했던 터라 더럽긴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자리에 얼른 밥을 내려주자 마음 먹고(저런 자리에 준 것이 그 때도 미안 했는데 지금 보니 더더욱 미안하다)

캔을 떨어뜨렸는데 하필 더러운 물그릇 모서리에 맞아 캔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배가 많이 고팠던지 허겁지겁 흩어진 것들을 먹기 시작 하는데 이 녀석, 지금 보니 임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쎄에~ 해서 카메라를 돌려 액정으로 아이 머리 왼쪽 방향을 보니

내 창에서 더 가까운 턱에는 아빠 고양이로 추정 되는 담북이, 한 칸 아래 저 뒷쪽 담벼락에는 까꿍이. 담북이도 배가 고픈지 지영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핥고 있고 저 뒤에 까꿍이는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마징가 귀를 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리라.

아 그런데 저 까꿍이 녀석 좀 봐라? 찬물도 아래 위가 있는 법인데 - 길고양이의 서열은 1. 임신한 암고양이 - 2. 대장 수고양이 - 3. 청소년 아깽이. 대략 이런 식이다. 그래서 앉아있는 위치도 담북이가 좀 더 먹을 것에서 가까운 것인데 제 마눌이 밥 드시는 데에 감히 접근 할 엄두를 못내는 아빠 고양이는 붇박힌듯 가만히 있는데 저 찌끄만 것이 잔뜩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담벼락을 타고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나름 어찌나 심각하게 살금살금인지 보고 있자니 같잖아서 실소가 저절로 터졌다.

그러다 서열 더 높은 즈 애비가 돌아보가 "흡!" 하듯 제 자리에 멈춰 앉는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당돌한 아깽이, 즈 애비가 다시 얼굴을 돌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할 동안 성큼 즈 엄마가 밥 먹는 곳에 한껏 가까워졌다. 바로 며칠 전까지 담장 타는 법, 인간에게 밥 달라고 하는 법 가르치던 어미였으니 새끼가 다가와 같이 밥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긴 인간 까꿍이 줄 캔을 다시 가지러 자리를 떠났는데 갑자기 "으그그갸갸갸~ " 하는 상당히 위협적인, 길고양이들이 제 밥자리 사수할 때 내는 소리가 들린다.

잰 걸음으로 돌아와 보니 어미란 것이 제 새끼에게 저따구 무시무시 앙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가 다시 임신 했으니 그리고 얼마 전에 밥 얻어 먹는 법까지 다 가르쳤으니 이제 네 밥은 네가 알아 챙겨라, 이건 내 거다! 하는 선언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제 새끼인데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인간은 어안이 벙벙한데

이것이 고양이들의 세상인지 겁이 난 까꿍이, 후다닥 물러나 아쉬운듯 제 어미가 먹는 밥을 돌아본다. 

하지만 역시 까꿍이다! 인간 집 방충망에 매달리던 기백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심기일전 되돌아 온다,

그리고는 귀가 거의 뒤집어지도록 긴장을 한 채로 제 어미를 건너다 본다.

아니나 다를까 어미는 다시 "그르르~으그그~" 그런데 요 까꿍이란 넘 지지 않고 대꾸를 한다. "으께, 께 엣?" 번역 하면 "엄마가 여기서 밥 얻어 먹으라고 해놓고 왜 그래?" 정도일까? - 아이가 다시 쫓겨나기 전에 인간은 재빠르게 준비해 온 캔을 떨어뜨렸다.

인간도 이 번에는  까꿍이가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게 위치를 절묘하게 잘 맞춰 떨어뜨렸다. 

엉뚱하게도 인간이 나서서 즈들 세계의 룰을 깨는 것이 기가 막혔던 것일까 그르르~ 를 멈추고 몹시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 보는 어미 고양이 지영여사. - 미안하다, 걍 같이 먹어라~

아무리 고양이 세계의 법칙이라도 밥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주는 넘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지 이 후로 두 녀석 모두 평화로이 밥을 먹고 입을 씻으며 각자 갈 길로 흩어졌는데

저 멀리 소외 된 한 외로운 영혼이 있었으니 까꿍이가 있던 담벼락으로 다시 내려와 "그럼 나는?" 하듯 고개를 갸웃~ 하고 올려다보는 수고양이 담북이. 물론 이 녀석도 늘 결국특식을 먹는 자리에서 캔을 얻어 먹었지만 어미란 것이 제가 다시 임신 했다고 아이를 저렇게 독립시키고 저렇게까지 모질 수도 있구나, 그들의 방식에 적지 않은 충격을 느낀 날이었다. 사진을 다시 보니 지영이의 제 새끼를 향한 "그르르~"가 새삼스레 생생히 귓전에 맴돈다.

ⓒ고양이와 비누바구니 All rights reserved.